CURRENT & PAST    UPCOMING
장 을 봉 조각展 - 오석(烏石)으로부터의 사유(思惟)
Reasons of obsidian, the duet of 'object' and 'myself'
NOV 20, 2015 - NOV 29, 2015

오석(烏石)으로부터의 사유, 물(物)과 아(我)의 이중주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

장을봉은 지난 15년 동안 오석(烏石)에 매료되고 몰입했으며 그것이 허용한 감흥에 성실하게 답해 왔다. 그에게 오석은 형상을 만드는, 형상 이하의 질료(質料) 차원이 결코 아니다. 원하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 투여되는 재료(材料)에 그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 안에 내포된 규산 성분으로 인해 연마효과가 뛰어난 돌에 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작가에게 오석은 그것을 통해 자연의 실체, 곧 시간의 비밀에 다가서도록 허용된 경로다.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원시성’, 곧 기원(起源)으로 난 길의 현현(顯現), 그 안에 발굴되기를 열망하는 무한한 빛의 반응을 숨기고 있는 검회색의 현현이다. 작가의 정과 끌이, 땀과 노동이 그 안에 비밀스럽게 담겨있었던 빛, 기원으로부터 온 빛의 일부를 밖으로 드러나도록 할 것이다. 감추어졌던 것들, 시간과 역사, 기원을 암시하는 절제된 광휘가 조심스럽게 세계로 끄집어내어질 것이다. 작가의 도구들은 집요하다. 정과 끌은 그것의 두께가 한계치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멈추지 않는다. 더 이상의 깎임을 견딜 수 없는 마지막 단계까지 나아가지 않고서는 결코 문명의 묵은 때를 벗겨낼 수 없다는 의미일까. 적어도 장을봉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직관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오석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장을봉의 세계에서 작가와 돌의 위계,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게 그것이다. 작가는 깎고 돌은 깎이는 것만이 아니다. 형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주체의 일방적인 달음박질로만 설명되어선 안 된다. 의지가 돌을 길들이는 만큼 돌도 의지를 길들이기 때문이다. 의도가 돌에 투사되는 만큼 돌의 저항도 의도의 조율에 나서기에 그렇다. 작가는 그것을 “명상 내지는 자기응시”로 요약한다. 더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오석에 의해 허용된 명상이요 자기응시로 말이다.
사실이다! 장을봉의 작업은 주체 자신을 향하는 성찰의 질문들로 충전된다. 시행착오를 동반하는 모색, 명료함의 결여, 모호함 또는 돌연한 당혹스러움, 처음으로 되돌아가기, 망설임에 에워싸이는 과정…. 돌을 연마하는 것과 연마할 주체를 연마하는, 곧 도구적 행위와 성찰적 행위가 동시에 그리고 상호유발적으로 진행된다. 작업의 질은 곧 이 상호유발 행위의 밀도에 의해 결정된다. 도구적 행위와 주체성찰행위 사이의 간극은 제로에 가까워진다. 결과로서 획득된 형상 역시 주체의 산물이자 자연에 의해 간섭된 주체, 촉구되고 유발된 주체의 산물이다.
이것이 작가가 추구하는 심미성(審美性)의 핵심이다. 이 심미성은 주체의 차원이 아니라 간섭되고 조정된 주체인 간주체(間主體), 또는 상호주체의 차원에서 결실되는 심미성이다. 대상, 또는 질료와의 수평적인 소통 안에서만 허용되는 심미성이다. 돌은 재단되면 그만인 대상이고, 기술은 방법론적 수행일 뿐이라는 주체적 폭력에 할당될 자리는 여기에 없다. 반면 포용함으로써 포용되거나 포용됨으로써 비로소 포용하는 기원과의 대면이 허용된다. 장을봉의 세계를 현대 미니멀리즘의 일환으로서 질료적 환원주의, 즉 일련의 유물론과 유물론적 미학의 속빈 부산물과 혼돈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이유다.


**

나는 장을봉의 깎이고 연마된 오석들 앞에서 이 사실, 곧 그에게 오석이 “질료인 동시에 궁극(窮極)”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그 안에는 그의 창작이 소위 ‘작업’을 ‘노동’으로 정화해내는 과정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장을봉에겐 노동이 곧 작업이요 명상이요 기도다. 이를테면 오석이 연마되는 만큼 존재의 깊이도 더해지는 어떤 존재적 상관성의 공간이 마련되는 것이다. 땀은 그것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증명서다. 정과 끌과 망치는 사실 돌만큼이나 돌을 다루는 주체를 다루는 존재론적 도구가 된다. 이렇듯, 지난 15년 동안 그에게 돌은 단순한 타자(他者)-질료가 아니라, 확장된 자아의 일환으로서 격상되어 왔다. 작업이 자연에 내밀하게 투사되는 존재행위라는 사실이 작가의 작업일기의 한 부분에 잘 적혀있다.

“…버거운 정과 망치가 분주히 오르락내리락...
톱날의 짙은 아우성, 검은 먼지의 흐드러진 춤사위.
…시간은 그렇게 떼이고, 깎이고, 잘리고, 갈린다.

조금 가벼워졌을까? 단정해졌을까?
아닐지라도 그만하면 족하다.
내 몸짓, 마음 짓은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어제처럼 스스로 그러하기를 바랄 뿐...”(장을봉)

보다 정확히 하자면, 작가에게 오석은 “궁극으로 나아가는 물화(物化)된 자아”이기도 했던 셈이다. 그 궁극은 무엇인가? 대상을 존재의 공간으로 초대해 들임으로써, 차가운 대상으로 머물지 않도록 하는 행위, 곧 사랑이다. 장을봉의 오석의 세계가 그 사랑이 아니고선 더 말할 수 없는 단계까지 나아온 셈이다. 이는 2002년에서 2008년 필자가 처음 그의 작업을 대했을 때의 감흥과 현재의 그것을 대조할 때 이 점이 보다 명확해진다. 2008년 당시 나는 그의 작업과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깊은 감영을 받았다. 그가 결코 녹록치 않은 길을 걸을 것이었기에 그 걸음의 의미를 확인함으로써 축하하고 격려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다음에 그 일부가 인용된 글을 썼고, 장을봉은 지난 8년 동안 약속을 지키는 사람의 모습으로 그 길을 반듯하게 걸어왔다.

“장을봉이 지난여름 내내 땡볕 아래서 매달려야 했던 이 작업은 집중을 요하며,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결과에 비해 너무나도 비경제적인 노동을 요구한다. 해서 이 자본과 이윤경제의 시대에 있어서는, 그다지 부합되는 형태의 노동이 아니며 따라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더 위축되어 갈 것이 분명한 영역이기도 하다.”(심상용)

그 의미가 이러하기에, 나는 현재 작가와 필자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도처에서 확인되고 있는 불길한 전조들을 고려할 때 더더욱 그가 걸어왔으며 걷고 있는 길의 의미를 새삼 되새기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볼 때 장을봉의 세계는 “천천히 완성하는 일들이 장점이 아주 많다”는 발타사르 그라시안(Baltasar Gracian)의 지혜의 대변자로서 지속적으로 그 진실을 들려주기 위해, 지난 시간 그렇게 신체적 고단함을 무릅쓰고 오석과 씨름해온 온 것이 분명하다.

© 2011 www.gallerykong.com
#157-78 Samcheong-dong Jongno-gu
Seoul Korea 110-230
T. 02 738 7776
E. info@gallerykong.com
  

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