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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 개인전 "육각의 방"
HEXAGONAL CHAMBER
OCT 22, 2013 - OCT 31, 2013

신경진의 변수:
측정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결과 사이에서

고동연 (미술사, 미술비평)

예술가-꿀벌농부-과학자
벌집은 일정한 원칙을 지닌다. 6각형으로 이루어진 벌집은 매우 다양한 곳과 환경에서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그만의 원칙을 갖고 있다. 표면을 덮는 특수한 코팅재로부터 만들어진 꿀과 스스로를 안락하게 보존할 수 있는 완벽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벌집의 형태는 그야말로 규칙적이다. 뿐만 아니라 벌의 사회적 군집 또한 완벽한 원칙에 따라서 구성된다. 꿀벌들은 개미만큼이나 정교한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그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꿀벌이 꿀을 모으기 위하여 취하는 방식도 일정한 원칙에 따라 진행된다. 이에 인간은 벌집의 디자인을 공부하고 이를 변형시켜 왔다. 인간은 자신의 편의를 위하여, 각 지역의 필요에 따라서 인위적인 벌집을 만들고 그것에 색다른 형태를 부여하여 왔다. 우체통과 같은 집의 형태로, 혹은 밑에서부터 쌓아 올라가는 탑의 형태로 벌집을 만들어 왔다. 여기에는 불변의 벌집이 지닌 육각형은 계속적으로 존재하지만 필요에 따라서 새로운 변화들이 추가되고는 한다.

신경진 작가의 전시 서문에서 장황하게 벌집의 이야기를 늘어놓게 된 것은 몇 가지 점들에 있어서 벌집의 원리를 이용하되 그 원리를 변형해온 벌집 농부들과 작가의 작품 제작과정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연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그로부터 일종의 원칙을 발견해 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작가와 농부가 하는 일이 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우연적인 변수와 원칙 사이의 조율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기존의 원칙이 지닌 오류를 부각시키고자 하였다면 벌집 농부에게 이와 같이 순수하게 지적인 과정은 일종의 사치에 불과할 것이다. 꿀벌의 벌집을 모방한 농부에게 모든 과정은 최대한 벌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최대한 꿀을 농부의 필요에 따라 수확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과학을 논할 때 흔히들 말하게 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경우에서와 같이 원칙을 발견해 내고 이로부터 변이를 잡아내는 것은 과학자나 예술가에게 공통된 것이다. 특히 과학적인 개념이나 방법론을 예술의 분야로 도입시키고자 예술가에게 과학적 지식과 체계적인 접근방법은 필수적이다. 뿐만 아니라 자연의 원칙에 대하여 집착하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약간의 오류, 변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경진 작가는 꿀벌 농부와 유사한 일을 하고 있다. 실제로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벌집 형태의 구축물을 사용하고 내부에 위치한 독거노인의 일상생활을 영상으로 제작하였다.

작가는 몸에서 밀납을 생산하여 집을 짓는 벌의 습성을 그대로 영상에 반영하고자 하였다. 아침과 밤을 규칙적으로 알리는 영상이 비춰지게 되고 독거노인을 연기하는 연기자는 매일 아침 동전모양의 밀납을 배급받는다. 연기자는 흡사 자신이 벌인 것처럼 매일 방 안에 있는 장치로 그 밀납을 녹여서 벽을 두껍게 바르는 행위를 반복하게 되고 실내벽은 꿀벌집의 그것과 유사하게 끈적한 액체들로 뒤덮이게 된다. 결국 작가는 특정한 원칙과 변수를 시시각각으로 실험대상에 제공함으로써 다양한 결과를 도출해내는 곤충학자나 꿀벌 농사꾼의 역할을 연기/수행하고 있다.
자연의 원칙을 망가뜨리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들어다보면 신경진의 접근방식은 농부나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과 차이를 보인다. 적어도 세상의 원칙이 존재하며 그 원칙을 제대로 발견해내고 구현해내는 것이 예술과 과학의 공통적인 목적이라고 믿었던 예술가-과학자들과 다른 목적을 지니기 때문이다. 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자연에서 발견되는 변수를 단순히 관찰하는 정도가 아니라 작가는 그러한 변수들을 직접 대입해 본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올 확률 중 가장 예측 불가능한 확률이 30퍼센트라는 점에 착안하고 이러한 예측불가능성의 빈도수가 실제로 실현될 수 있도록 30퍼센트 확률로 비가 오도록 기계를 프로그램화 하였다. 혹은 원적외선을 이용해서 태양의 상태를 모방하였지만 약 93.5퍼센트의 확률로 전구에 빛이 들어오도록 해서 불이 불안하게(작가도 예측하기 불가능한 상태로) 깜박거리도록 만들었다. 자연의 법칙을 발견해내고자 한 수동적인 예술가-과학자보다 더 적극적인 입장에서 일종의 우연적인 상황들을 연출해 내고 있는 샘이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될 테이블 설치작업에서도 작가는 우연적인 상황에 해당하는 실제적인 물건들을 수집한다. 그리고 이러한 물건들이 최대한 그것들이 지닌 기본적인 형태에 의하여 인식될 수 있도록 최소한의 개입을 하게 된다. 작가는 원형태의 표면에 석고를 덧입히고 결과적으로 개별적인 특징이 덜 두드러지게 만든 후에 테이블 위에 나열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개별적인 물건들의 특수성을 배제하고 모든 형태들을 일종의 유형화된 형태에 귀속시키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물건들은 작가가 최근 발견한 세계의 기본 물질을 간략화한 일종의 도면위에 놓이게 된다. 도면은 대안종교(조로아스터교, 유태인 카발라, 혹은 불교)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세상을 지배하는 네 가지 기운이 원의 각 부분에 위치하고 있고 그것들 간의 만남이나 충돌에 의하여 다양한 현상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명시한다. 즉 원칙과 변화의 삼라만상 원칙을 담은 테이블 위에 각각의 변종들, 드러난 현상들이 놓이게 되는 것이다.

몸을 이용하다.
자연의 원칙과 그 위에 놓인 각각의 개별성, 혹은 변이의 과정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신경진이 주로 사용하는 중요한 소재는 ‘몸’이다. 예를 들어 신경진이 인천 비엔날레에 선보인 신체 측정기 <비너스를 흉내 내다(Mimicking Venus)>(2012)는 이러한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거대한 구 내부에 연결된 각각의 핀을 자신의 신체로까지 밀어 넣게 만든다. 일반화된 형태 내부에서 작가 스스로의 신체가 지닌 특수한 조건을 잡아내고 이를 통하여 전체 신체를 측정할 수 있게 된다. 흡사 르네상스 시대에 이상화된 남성의 누드 형태로부터 변이를 통하여 여성의 형태를 만들어낸 누드화법이나 이상화된 얼굴상으로부터 수많은 변이를 만들어낸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얼굴 드로잉을 연상시킨다. 물론 여기서 여성의 몸, 혹은 선을 행하지 못한 악인의 모습이 변이에 해당하는 것은 남성위주의 전통적인 미학에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에서 작가가 스스로의 신체적 모형을 측정해가는 방식이 상징적인 의미에서나 실제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원칙으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몸이 지닌 특수성, 결코 단순히 일반화될 수 없는 특수성은 주요한 가변요인으로 작용한다. <피라미드 프로젝트(Pyramid Project)>(2008)에서 작가는 이집트인들이 원래 피라미드 삼각형의 비율을 지구 반지름을 기준으로 맞추었다는 데에 착안하고 지구 반지름 대신에 작가 지인들의 신체 둘레를 대입한다. 결과적으로 안정되었다가 보다는 길쭉하고 인간 신체의 다양성을 반영한 다양한 비율의 피라미드가 완성되었다.

혹은 <웃으면서 자살하기(Smiley Suicide)>(2009)에서와 같이 일탈은 부족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는 머릿속의 산소가 약간 부족하게 되면 생겨나는 변화를 직접 자신의 몸을 사용하여 실험한다. 섬뜩한 총안에서 뿜어 나오는 래핑가스를 마신 후에 작가는 그야말로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도 그러나 멀쩡한 것도 아닌 묘한 상태에 돌입한다. 정신이 흐릿한 이 상태는 결국 산소가 뇌에 1퍼센트 정도 부족한 상태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미 작은 변수에 의하여 신체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와 같은 반전의 상태를 작가는 자기 파괴의 끔찍한 의미를 담고 있는 자살적인 행위에 비교한다.

측정 가능한 변수와 그렇지 않은 결과 사이에서
현대미술에서 일상성과 변수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작업의 예는 빈번하게 발견된다. 1960년대 건축을 전공하였던 솔 르윗은 대안 수학에 관심을 지녔으며 많은 개념, 미니멀 작가들은 어떻게 하면 작은 변수를 통하여 매우 단순하고 반복적으로 보이는 입방체를 변형시키고 진열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그러한 고민들의 저편에는 결국 매우 단순하고 비실용적인 설치작업들이 궁극적으로 대안적인 원칙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염원은 서구에서는 더 이상주의적이고 이성적인 르네상스 시대에도 강하게 등장한바 있다. 신경진의 소위 실험/설치 작업들은 이와 같은 미술사적 계보를 따른다. 대학교에서 2년 동안 로보틱 학생 클럽에서 로봇의 새로운 움직임을 탐구한 작가에게 과학적이고 물리적인 지식은 객관적인 토대를 가진 실제적인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인간의 과학적 추측이 그러하듯이 과학적인 원칙의 절대성이나 통계가 지닌 완벽한 예측가능성을 부정한다. 정확히 말해서 한편으로 신경진이 주장하는 변수는 과학적 지식, 역사적 지식, 과학적 체계로부터 유래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러한 수치들이 제대로 결과에 반영될 수 있도록 로봇 프로그램과 같은 기재를 사용한다. 일기예보의 30퍼센트 오류로부터 피라미드의 반지름 원칙을 활용한 피라미드 주물 기계에 이르기까지 그는 특정한 변수들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과정에도 불구하고 신경진이 만들어내는 상태(산소가 부족한 작가의 물리적, 정서적인 상태)는 과학적 실험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들이 아니다. 결국 작가가 도출해내고자 한 결론은 일상성과 변수사이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일반화의 법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변수를 더욱 부각시킴으로써 전혀 새롭고 특수한 상황들을 창출해내려는 것이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이쯤 되면 관객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렇다면 정해진 변수와 측정가능하지 않는 결과 사이에서 과연 작가가 만들어 내고자 하는 창조적인 상황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관객이 경험함으로써 관객은 무엇을 얻어갈 것인가? 만약 변수만을 실험하게 될 경우에는 작가의 예술작업은 극도로 지적인 과학적 실험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반면 만약 변수에 의하여 생성된 예측 불가능한 결과만 강조될 경우 신경진의 작업은 과학적 지식을 활용한 일종의 제스처, 즉 ‘과학쇼’와 같이 여겨질 것이다. 신경진의 국내 첫 개인전은 지적인 실험과 과학적 쇼, 제스처 사이에서 작가가 앞으로 택하게 될 방향을 처음으로 선보이게 되는 중요한 자리가 될 것이다. 물론 관객도 결국 예술이 과학과 만났을 때 새로운 지식과 경험, 둘 중에서 무엇을 얻게 될지에 대하여 예의 주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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